[잡포스트] 우리 뇌는 술을 마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일을 모두 기록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블랙아웃(Black out)'현상이 그것이다.
소위 필름 끊김 현상이라고 하는 블랙아웃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미국 알코올 남용 및 중독 연구소(NIAAA)는 술을 마시면 일상 기억을 모으는 등 중요한 회로 역할을 하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가 알코올로 차단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기록 저장소에 틈이 생기는 것이다.
음주 후 블랙아웃 현상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부분적 블랙아웃 현상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예를 들어 술은 마신 것은 기억해도 술값이 얼마나 나왔는지, 누가 계산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여기에 해당된다.
전문가들은 기억을 집중해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완전 블랙아웃 현상은 음주 후 수 시간을 통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데 뇌에 기억이 아예 저장이 되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릴 방법이 없다.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지게 되면 범죄를 일으킬 확률은 훨씬 높아진다.
그러나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범죄가 있다. 준강간죄가 그것이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간음을 한 경우에는 형법 제 299조에 따라 준강간죄로 처벌되는데, 처벌 수위는 강간죄에 동일하며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결코 가볍지 않은 처벌이지만 술에 만취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결여되다보니 본인도 성범죄를 저지를 고의가 없었음에도 성범죄자로 연루되는 경우도 있다.
즉, 상대방의 동의를 구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히 준강간의 경우 그 행위가 미수에 그친다 하더라도 처벌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안이하게 대응했다간 실형을 피하기 어렵다고 한다.
술 마신게 죄, 억울하게 준강간 혐의를 받고 있다면
준강간죄는 주로 피해자가 만취 상태로 인해 심신상실 혹은 항거불능 상태임이 입증되고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될 경우 실형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반대로 피해자가 만취 상태로 항거불능임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다면 준강간죄에 대한 무혐의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억울하게 준강간죄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면 범죄 요건이 성립하지 않는 증거등을 통해 밝혀야 억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술에 취해 강간 미수에 그쳤어도 처벌된다
그렇다면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면 무조건 무혐의로 벗어날 수 있을까?
형법 제300조는 준강간죄의 미수범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형법 제27조는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인하여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하더라도 위험성이 있는 때에는 처벌한다. 단,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불능미수범을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준강간 행위가 완성되지 않고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처벌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19년 대법원은 자신의 처제가 만취 상태라고 오인해 간음한 남성에게 준강간미수혐의를 적용해 행위 당시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준강간죄가 성립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결과 발생의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준강간죄의 불능미수로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이 남성이 준강간 미수로 처벌받은 형량은 징역 2년과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제한 5년이다.
강간 미수이고 술에 취해 정상적인 판단이 결여되었음이 인정되었어도 벌금형없는 실형 선고를 받았다는 점에서 성범죄가 발생하면 처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블랙아웃 주장 제자 성폭행한 교수 징역 2년 6개월
그렇다면 블랙아웃 성범죄는 선처가 가능할까.
2019년 10월 자신의 제자인 피해자 A씨와 모 노래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중 A씨에게 자신의 신체 특정 부위를 만지도록 하며 유사강간을 한 교수 B씨는 재판과정에서 검찰측 공소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택적 기억장애일 수 있다"고 발언하며, 1차 공판에서는 심신미약을 적극 내세웠지만 3차 공판에서는 돌연 술에 의한 기억장애인 이른바 ‘블랙아웃’을 주장하며 선처를 노렸다.
검찰은 국립대 교수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제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것은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6년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초범인 점,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음에도 블랙아웃으로 범죄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징역 2년 6개월에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수강, 그리고 출소후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시설에 대해 10년간 취업제한도 함께 명령했다.
법무법인 오른 박석주, 백창협 형사전문변호사는 성범죄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블랙아웃 주장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가해자의 블랙아웃 주장은 구체적인 입증 자료가 없다면 변명으로 비춰질 수 있어 재판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대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과거에는 준강간죄의 경우 술에 취해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해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게 되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최근 성범죄에 대해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고, 무작정 범행을 부인한다면 사안에 따라 구속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신중한 법적 판단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