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선 17대 효종 ‘북벌론’의 허구성
[칼럼] 조선 17대 효종 ‘북벌론’의 허구성
  • 임택 기자
  • 승인 2023.02.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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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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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포스트] 임택 기자 =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국가는 반드시 국정 철학이 있다. 조선 17대 왕 효종과 조선 후기 얘기다. 효종은 병자호란 후 친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다. 8년의 기간이다. 그곳에서 훗날 자신의 대를 잇는 현종도 낳았다. 효종은 집권 기간 북벌론을 주장했다.

이 북벌론을 두고 당시 집권당이었던 서인과 묘한 동상이몽을 꿈꿨다. 아버지 인조와 함께 서인에 의해 외교를 할 수 없었던 군주였다.

서인은 인조 이전 광해군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광해군 당시 집권 세력은 북인이었다. 북인은 붕당의 기본 조건인 협치가 되지 않는 1당 체제로 운영됐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폐모살제’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정책의 노선을 유지했다는 명분을 세워 서인은 광해군과 북인을 내쳤다. 인조반정이다. 이때부터 광해군은 연산군과 더불어 왕의 직위를 가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폭군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선조는 의주로 도망가고 광해군은 분조 활동을 통해 전쟁터를 누볐다. 민심도 보았다. 전쟁의 참혹상을 누구보다도 몸소 겪었다. 생활상과 국민의 정서는 바닥을 쳤다. 이때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의 출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출병 전전날 강홍립과 광해군은 사관을 내보내고 독대를 했다. “출병은 하되 전쟁은 하지 않는다”라는 중립 정책이다. 광해군의 정책을 밝아야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명분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서인은 친명 배금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인조다. 인조는 친명 배금이라는 정권의 명분 때문에 명나라가 저물고 후금이 세력을 키워 오는 데도 어떠한 외교도 하지 못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외교를 했더라면 두 번의 호란은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중화사상에 의해서 오랑캐로 여겼던 청나라와 교류를 하는 순간 친명 배금이라는 정권을 세운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에 정묘호란 때 명·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해놓고 중립을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지금의 인조가 삼전도로 끌려와 ‘삼배고구두례’라는 치욕을 겪었다. 군신 관계의 의식이었다. 청 태종은 최초 인질로 삼정승과 6부의 판서 자녀, 그리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총 10명을 심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뒷날 당시 7명 대신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자신들의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국왕이 치욕을 겪고 있는 순간에도 사직서 제출로 책임을 면해 보려는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청 태종은 생각을 바꿔 인조의 두 아들과 삼학사만 심양으로 데려갔다.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은 8년을 보내고 돌아왔다. 청나라와 소통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했다. 독살설도 있다. 인조는 봉림대군을 자신의 후임으로 세웠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론’을 들고나왔다. 인조의 원한을 갚는다는 취지였다.

서인도 환영했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론은 정책으로 그쳤어야 했다. 이 어리석은 군주는 현실적으로 북벌을 하려고 들었다. 군제를 정비해 그와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과 함께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해 여러 곳에 진을 설치했다. 무관을 우대하는 등용 정책을 펼쳤고 군사훈련의 강화에 힘썼다.

실질적 북벌론 vs 관념적 북벌론

서인의 정권 유지를 계산법은 복잡했다. 머릿속에는 북벌론은 없었다. 서인의 정권 연장술은 효종의 북벌 정책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성리학의 거목이었고 효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나섰다. 당시 서인들이 효종의 북벌론에 호응했던 것은 정권 유지를 위한 명분론이었다. 효종과 서인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관과 승지까지 내보낸 채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 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자신의 형이었던 소현세자에 이어 효종도 독살설이 돌은 이유다. 송시열과 독대 후에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이 외교를 하지 않고 정권 유지를 위해서 왕권을 무참히 짓밟은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실질적으로 북벌을 하려고 했던 효종과 송시열의 정권 유지를 위한 관념적 북벌론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서인 정권의 씨앗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서인은 현종에 이어 숙종 때 노론 소론으로 분파됐다. 영조, 정조 시절 탕평책으로 노론 세력이 숨은 듯했지만,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제23대 왕인 순조 비로 들어가면서 안동김씨, 헌종 때 풍양조씨, 철종 때 안동김씨 등 60여 년을 매관매직으로 조선 후기를 장악했다. ‘사람은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라’는 말도 바로 이때라고 보면 된다. 노론의 양반 계층이 조선 후기를 농락한 시기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고대·중세·근대·현대를 이어져 내려오면서 국가는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인조·효종 때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은 외교를 하지 않았다. 친명 배금으로 광해군을 내치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전쟁을 앞에 두고도 자신들의 정권 연장에 눈이 멀어 국민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서인들이 외교만 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호란이었다. 역사적 사실은 시대를 떠나 현 정치인들이 귀담아들어야 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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