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견리망의(見利忘義)한 세태를 넘어 견리사의(見利思義 )를 생각한다
[시사칼럼] 견리망의(見利忘義)한 세태를 넘어 견리사의(見利思義 )를 생각한다
  • 한건우 기자
  • 승인 2023.12.11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전)동의대 철학윤리문화학과 외래교수
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전)동의대 철학윤리문화학과 외래교수

[잡포스트] 교수신문이 매년 12월, 교수들의 추천과 투표를 거쳐 결정되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가 채택됐다. 견리망의는 ‘이로움을 좇느라 의로움을 잊었다'는 뜻이다.

올해는 20명의 추천위원이 26개의 사자성어를 추천했고, 이 가운데 예비심사를 거쳐 5개의 사자성어를 고른 뒤 전국 대학교수 1315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교수 395명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를 꼽았다고 한다. 2위는 '적반하장(賊反荷杖, 335표)이, 3위는 '피리를 불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피리 부는 악사 틈에 끼어 인원 수를 채운다'는 뜻의  '남우충수(濫竽充數, 323표)'에 돌아갔다.

견리망의를 올해의 사자성어 후보로 추천한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명예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는 견리망의 현상이 난무해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다"며 "정치란 본래 국민들을 '바르게(政=正) 다스려 이끈다'는 뜻인데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바르게 이끌기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가백년지대계를 생각하는 정치보다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자기편에게 유리한 정치만 하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그는 이어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교권침해 등 견리망의 현상이 사적 영역에서도 확산된 한 해가 됐다고 지적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이 고사는 장자가 조릉(雕陵)의 정원에 갔다가 얻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다. 조릉의 정원으로 사냥을 간 장자가 날아와 앉아 있는 큰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장자는 새를 향해 활을 쏘려했지만 이상하게도 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 큰 새는 제비를 노리고 있었고, 제비는 또 제비대로 나무 그늘의 매미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매미는 제비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그렇다. 큰 새와 제비, 매미 모두는 당장 눈 앞의 이익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몰랐다. 장자가 '세상의 이치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원사가 다가와 '이 정원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책망했다. 장자 또한 이(利)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던 셈이다. 이것이 바로 '견리망의'다.

이와 대비되는 고사성어로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있다.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 '이익을 보거든 대의를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사람됨에 대해 묻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성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지혜, 청렴, 용기, 재예, 예악을 두루 갖춘 사람을 성인'이라고 답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눈 앞에 이로움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목숨을 바치며 오래된 약속일지라도 평소 그 말을 잊지 않으면 또한 성인이라 할 것이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고 답했다. 특히 '나에게 이익되는 것을 눈에 보거든 옳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기에 닥치면 목숨을 바친다(見利思義, 見危授命)'는 구절은 안중근 의사께서 순국전 여순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묵으로도 유명하다. 

공자와 같은 맥락으로 맹자 또한 이(利)를 버리고 의(義)를 따르는 자를 군자라 했다. 그렇다면 의(義/올바름)란 무엇인가? 맹자는 의란 공공의 선, 즉 공익이라고 답한다.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 추구보다 공동체의 원칙을 우선하는 것이 의를 좇는 군자의 도리라 본 것이다. '견리사의'라는 말 속에는 이렇듯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공동체의 도덕이 함축돼 있다. '견리망의(見利忘義)'와 '견리사의(見利思義)', 망(忘)과 사(思), 글자 한 자 다를 뿐인데 의미는 이렇듯 하늘과 땅 차이다.

암울했던 시절, 일제강점기 역사를 떠올리면 늘 연상되는 인물들이 있다. 독립군과 친일파, 애국자와 매국노다. 목숨을 바치며 독립에 헌신했던 독립투사가 있었던 반면에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민족을 배신하고, 동료의 등에 칼을 꽂으며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했던 변절자, 매국노도 있었다. 

백년이 지난 현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며 자신의 소명과 책무를 실천하는 공직자도 있는 반면 선거철만 되면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과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지지를 호소하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듯 하다가도 막상 ‘뱃지’라도 달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정치 모리배도 넘쳐난다.

진실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치인 중 ‘견위수명’은 고사하고 ‘견리사의’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정치(政治)란 무릇 말 그대로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의(義)’를 잊고 ‘이(利)’만 탐한다면 세상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견리망의한 세태에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세한지송백(歳寒知松柏)’, 한겨울이 돼야 송백의 푸르름이 더욱 빛남을 알 수 있듯 견리망의한 세태일수록 견리사의를 더욱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