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시사칼럼] '공정'에 대한 소고(小考)
[조용우 시사칼럼] '공정'에 대한 소고(小考)
  • 한건우 기자
  • 승인 2023.12.21 1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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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전)동의대 철학윤리 문학학과 외래교수.
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전)동의대 철학윤리 문학학과 외래교수.

[잡포스트] 한국사회만큼이나 전통적으로 공정의 가치에 대해 예민한 나라는 흔치않다. 유교적 전통의 봉건적 신분과 위계질서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민족임에도 평등이나 공정에 대한 가치는 매우 중요시 여겨져왔다. 지배계층의 폭정에 저항한 숱한 농민 반란과 민중 봉기의 대부분도 차별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반기로 일어났다.

그런데 한국사회만큼 공정의 가치에 예민하면서도 동시에 기득권의 특권의식 또한 강한 사회도 드물다. 민주적 질서가 보편화된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인데 기득권 세력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특권이 몸에 체화돼서 그런지 도무지 윤리적 의식 따위가 없다.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사하고 기득권 자체를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내가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부당한 내로남불의 경우도 허다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 가장 흔한 내로남불이나 아전인수식 주장들 모두 기득권층에 팽배해 있는 이런 모럴 헤저드에 기인한다. 학폭, 부정입시 등 왜곡된 특권의식에 의해 가해자가 된 자들 역시 그들의 행위가 특권과 반칙에 의한 불공정 행위이며 그 행위 때문에 누군가는 억울한 피해자가 됐을 것이라는 의식이 없다. 오로지 자기 변명과 자기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불공정에 대한 이런 내로남불식 해석은 실로 ​공정에 대한 시민 의식의 부재로 볼 수밖에 없다.

공정의 철학자 존 롤스는 '공정' 할려면 원초적 상태인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말해 기회가 주어지거나 경쟁을 시작할 때 그 사람의 배경이나 환경, 즉 백그라운드를 제거하는 무지의 베일을 상정하는 것이다. 출발선에 선 모든 주자들은 그 어떤 배경이나 외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빠 찬스와 인맥, 학맥 같은 기득권의 배제는 기본이다. 평등한 기회는 모두가 누구의 아들인지, 어떤 학교 출신인지, 어느 집단의 인맥인지 심지어 성별 마저도 철저히 무지의 베일 속에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특권이고 불공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설령 무지의 베일이 작동해 그 어떤 특혜나 기득권의 영향력 없이 출발선에 섰다고 하더라도 경쟁선에 서기 전까지 문제가 있다면? 쉽게 말해 애시당초 출발선에 서기까지의 조건이 서로 다르다면 경쟁은 하나마나한 것이 아닌가. 백미터 달리기를 같은 출발선에서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한다면 과연 공정한 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룰이 공평하다 하더라도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달리기나 축구 시합을 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여기서 롤스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회의 균등이 갖는 한계, 즉 자유주의 경쟁의 불공정함에 대해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한 조건을 완화하거나 보완해 출발선에 서게 해야 정의로운 경쟁, 즉 공정한 출발이 가능하며 제대로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롤스가 말하는 최소수혜자의 원리, 롤스 정의론의 제 2원칙인 차등의 원리 혹은 평등의 원칙이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공정의 가치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의 원리가 공정한 출발을 위해 약자에게 더 유리한 기회를 주는 조건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아예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적극적이고 선도적으로 케어해 그들이 평등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농어촌 아이들에게도 강남 8학군 못지 않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하며 강남의 부모처럼 부모가 못해주면 국가와 공동체가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야만 평등한 기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공정론은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는 내용적 평등 그리고 보편적 사회복지정책, 적극적 사회보장제도와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공정의 기준은 '평등'이 아닌 '능력'이라는 주장이 있다. 개인의 능력만이 모든 경쟁을 정의롭게 만드는 공정의 원리라는 '능력제일주의'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뤄지는 경쟁은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경쟁을 한다고 보자. 그러면 경쟁의 도구는 능력과 노력만 남게 된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 발휘를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입증하게 된다. 여기서 노력은 문제가 없다. 노력해 이룩한 성취에 대해 공정을 문제 삼거나 이의를 제기할 경우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고 결과에 승복할 것이다.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가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은 어떨까? 노력화된 능력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선천적인 능력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타고난 재능과 외모, 지능 등등 요즘말로 우수한 DNA이다. 부모 잘만난 소위 '금수저'는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혹은 좋은 환경 탓으로 그러한 우수한 DNA가 잘 발현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 등은 나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운'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전과 달리 시대가 변해 대중음악이나 운동 실력으로 부와 명성을 누리는 경우 역시 시대적 환경이라는 '운'의 작용의 결과이다. 

이러한 '운'에 따른 결과를 우리는 오롯이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부모덕에 호강하는 부유층 자녀의 삶이 공정한 경쟁에 따른 정의로운 결과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우연히 사놓은 부동산의 폭등으로 일확천금을 벌고, 로또 일등 당첨돼 부자가 된 경우를 공정한 결과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또한 대중음악 스타나 스포츠 스타가 순전히 타고난 자신의 재능만으로 부와 명성을 획득했다면 그들 성공의 결과를 무조건 그들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뛰어난 지능을 물려받아 적당히 공부해도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면 그 결과를 오롯이 그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롤스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부러우면 너도 잘난 부모나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 만나"라는 말은 정의도 공정도 아니다. 단지 부모 잘 만나서 또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아니면 잘 생겨서 혹은 똑똑해서 타고난 재능만으로 성공했다면 그것은 공정한 성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운 자체를 탓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소위 '잘 나가는 부모'도 '못 나가는 부모'도 내 탓이 아니며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도 흙수저로 태어나는 것도, 지능이 우수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모두 내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그러한 '운'의 요인으로 경쟁에서 승리하거나 성공했다면 그 결과는 부정할 수 없으나 그 결과가 정의롭고 공정하기 위한 사회적 책무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책임의 이행이고 기득권의 사회적 책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실천이다. 부모를 잘 만났든, 재수가 좋았든, 시대를 잘 타고났든, 운에 의한 불로소득(노력 이외의 소득)의 이익과 성공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재분배되고 공유돼야 한다. 그것만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수긍하고 인정하는 공정에 가깝고 정의로운 결과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롤스는 공정에는 반드시 두 가지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가장 우선돼야 할 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롤스 정의론이 사회주의적 이념과 결정적인 차별성을 가지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힘이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자유로운 개인은 누구나 동등하게 자유를 누릴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자유 제 1의 원칙인 셈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란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의 몫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두번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배정돼야 한다. 즉 최소수혜자를 위시한 모든 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차등의 원칙), 공정한 기회균등 아래 직책과 직위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돼야 한다(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불평등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을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돼야 하고, 또 그 불평등의 계기가 되는 지위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말이다.

이 ​차등의 원칙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자유주의적인 형식적 평등의 원리가 묵인해온 사회적, 자연적 행운이나 우연을 배제하고, 그러한 요인들에 의해 주어진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을 사회의 공동자산으로 간주해 이를 최소수혜자의 이득을 도모하는 데 이용하자는 것이다. 롤스는 이를 통해 평등한 분배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즉, 분배적 정의의 문제를 기회의 형식적 균등으로부터 결과의 실질적 평등으로 끌어올리는 현대적 전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우선하는 원칙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롤스 정의론이 가지는 핵심적인 사회적 함의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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