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의 야구 이야기] 내 인생, 후회 없이 마지막까지
[이만수의 야구 이야기] 내 인생, 후회 없이 마지막까지
  • 박희윤 기자
  • 승인 2024.01.1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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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사진_헐크파운데이션)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사진_헐크파운데이션)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 야구를 시작했으니 그 시절에도 늦은편이었지만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는 야구는 정말 나의 삶에서 새로은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도대체 야구를 어떻게 시작했고 또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는지 다시한번 내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지금도 이해가 잘 안되는게 어떻게 14살 중학교 1학년생이 무슨 기대를 갖고 꿈을 키웠을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나와의 약속을 한가지 정하고 중학교 1학년부터 세웠고, 그 약속이 60대 후반을 달려가는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것은 하루 4시간만 자고 야구하는 것이었다.

14살 중학교 1학년생이 그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11년 동안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 4시간만 자고 운동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야구를 시작하다보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늘 후보선수였으니, 선배들 잔심부름만 도맡아 하고, 또 일찍 운동장에 나가 돌을 주어야 했다. (내가 운동할 당시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야구를 했기 때문에 인조잔디는 생각지도 못한 시절이다)

야구를 늦게 시작했기에 도저히 다른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따라갈 수 없는 기량을 가져 중학교 시절에 1년 유급을 했다. 그래서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도합 11년 동안 하루 평균 4시간만 자고 야구를 했다.

젊은 시절의 이런 습관 때문에 지금도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흘러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야구를 시작했음에도 그나마 조금 야구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루틴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새벽에 했다. (내가 야구하던 시절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은 금기였다)

그런데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이렇게 시작했던 웨이트 트레이닝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고 또 자연스럽게 프로 입단과 지도자생활 할 때까지 꾸준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게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체계적으로 하다보니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보다 힘이 좋은 선수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적인 예로 팔씨름 해서 져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중학교 2학년부터 '야구일지'를 쓰게 되었고, 훈련 마치면 나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다 기록해놓고 혼자서 애써 연구했던 기억이 난다.

세번째는 야구를 처음 해본 내가 어떻게 그때부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는지 정말 신기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은 개인연습할 때 무작정 배트만 휘두르지 않고 가상으로 상대 투수를 생각하며 스윙연습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활애해서 연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포수였기 때문이다. 스윙을 한시간 했으면 똑 같이 포수 연습도 한시간 했다. 이때도 무작정 스로우잉 연습 한것이 아니라 가상으로 주자가 1루에서 2루로 도루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연습했다. 다시 주자가 2루에서 3루로 도루한다는 생각을 갖고 스로우잉 연습 했던 기억이 난다.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스윙할 때 하나를 하더라도 전력으로 스윙했고 또 하나 할 때마다 바깥쪽 들어오는 볼을 대비해 스윙했고 두번째는 몸쪽으로 들어오는 볼을 예상하고 스윙연습했다. 또 변화구 들어올 때는 어떻게 스윙해야 할지 한템포 늦추어서 스윙했던 기억이 난다. 

네번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유연체조다. (어린시절이지만 유연체조만 30분 했다) 그때부터 시작하게 된 유연체조를 평생하게 되었다.

다섯번째는 무조건 한시간 이상 로드웍을 했다. 아마 이 덕분에 아마야구와 프로야구 할 때까지 큰 부상이 없었다. 지금도 60대 후반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여전히 몸의 유연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편이다. 내가 생각해도 선수시절에는 나만큼 유연한 선수들을 잘 보지 못한것 같다.

이른 새벽시간에 로드웍 할 때 발목 다치지 않기 위해 뒤꿈치를 의식적으로 올리고 뛰었고 발목을 접질어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몇번 발목만 돌리면 괜찮아 졌고 유연함 덕분에 큰 부상 없이 야구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습관이 된 '일기'와 '야구일지'는 평생 써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것은 아내 덕분이었다. 대학시절 아내와 만나 말 주변이 없던 내가 아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대학 1학년 시절부터 규칙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아내 덕분에 지금도 책을 나의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어린시절에 가졌던 좋은 습관으로 인해 그 작은 습관 하나가 평생 나의 삶을 좌우했다. 

어린시절에 끊임 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했던 것이 오늘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은 부모님께서는 중학교 2학년시절부터 전국대회 다 따라 갈 수 있도록 모든 경비를 대주셨다. 야구를 잘하지 못했지만 회비만 내면 그 당시는 원정경기는 따라갈 수 있었다.

선배, 형들이 경기할 때면 나는 교복을 입고 스탠드로 올라가 전 경기를 다 집중한채 노트에 그날의 경기를 기록하며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왜 이 상황에서 그런 작전을 내었을까?' '왜 주자가 있을 때 초구부터 과감하게 치지 않았을까?' '왜 선배는 그 당시에 뛰지 않고 멈추어 섰을까?' '왜 이런 상황에 도망가는 피칭을 했을까?' ' 왜 이런 상황에서 변화구를 던지지 않고 직구를 던졌을까?' 등 이 모든 것들을 스탠드 위에서 다 기록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해도 별거 아닌거 같지만 중학생인 이만수를 생각하니 참 대견하다. 어린 나이에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야구를 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지 못하다. 그런데 야구 만큼은 신기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체계적으로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지금까지 지키면서 달려온 또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10년, 10년, 10년, 마지막으로 20년, 목표를 세우고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처음 10년은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인 중학교 1학년 시절에 10년을 내다보고 꿈을 키웠다.

두번째 10년은 미국에 들어가 10년을 내다보고 미국에서 꿈을 키웠고, 세번째 10년은 한국에 들어와 10년을 내다보고 꿈을 키웠다.

마지막 20년 프로젝트는 인도차이나반도인 라오스와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으로 내려가 야구를 전파하고 보급하는 꿈을 가졌다. 이렇게 50년의 꿈을 가졌지만 10년씩 꿈을 가질 때마다 구체적으로 꿈을 꾸었고 또 그 꿈을 위해 지금까지 한번도 포기하지 않고 나의 인생철학인 “Never ever give up” 정신으로 달려왔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80살까지 인도차이나반도로 내려가 야구를 전파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꿈이다. 이렇게 나의 인생에서 10 + 10 + 10 + 20 = 50년의 꿈을 갖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에 있다. 내가 생각했던 꿈이 다 이루어지면 그때 나는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더 큰 안식을 얻으리... 

[글 /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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